본문으로 건너뛰기

한국 IT에서만 통하는 콩글리시 모음

· 약 5분

한국에서 IT를 하다 보면 콩글리시를 많이 써요. 운영 환경을 "리얼 환경"이라고 하고 서비스 출시를 "오픈"이라고 하는데, 처음에는 어색해도 몇 달 지나면 자연스럽게 입에 붙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 영어권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게 돼요.

환경 이름부터 다르다

**"리얼(real)"**은 한국 IT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콩글리시 중 하나입니다. "리얼 환경에 반영했습니다", "리얼 DB 접속 정보 주세요"처럼 쓰며, 여기서 리얼은 운영(production) 환경을 뜻합니다.

영어권에서는 production, 줄여서 prod라고 합니다. "real"이라는 표현을 쓰면 "진짜?"라는 반응이 돌아올 수 있습니다. 의미는 통할 수 있겠지만, 업계 용어로는 쓰이지 않습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스테이징(staging)은 그대로 쓰이고, 개발 환경은 데브(dev)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유독 운영 환경만 "리얼"이 된 점은 재미있습니다.

동사로 쓰이는 영어 명사들

한국 IT 현장에서는 영어 명사를 한국어 동사처럼 활용하는 패턴이 많습니다.

"커밋 때리다"는 git commit을 한다는 말입니다. "때리다"가 붙으면서 묘한 역동성이 생깁니다. "머지 태우다"는 merge를 수행한다는 뜻인데, "태우다"가 왜 붙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다들 자연스럽게 씁니다.

빌드를 실행할 때는 "빌드 돌리다"라고 합니다. 그나마 직관적인 표현입니다. deploy한다는 뜻의 "배포 나가다"도 있습니다. "이번 주말에 배포 나갑니다"처럼 쓰며, 배포가 어딘가로 출타하는 느낌을 줍니다.

이런 표현들은 영어 단어를 쓰고 있지만 영어권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I hit a commit"이라고 하면 상대방이 멈칫할 것입니다.

의미가 미묘하게 비틀린 단어들

어떤 콩글리시는 영어 원어와 의미가 살짝 다르게 정착했습니다.

영어에서 spec은 specification, 즉 기술 명세를 뜻합니다. 한국 IT에서도 **"스펙(spec)"**을 그 의미로 쓰지만, "이번 스펙 좀 큰데요?"처럼 작업 범위(scope)나 난이도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컨펌(confirm)"**은 조금 다릅니다. "컨펌 받았어요?"는 승인(approval)을 받았느냐는 뜻입니다. 영어의 confirm은 "확인하다"에 가깝고 승인의 뉘앙스는 약하니, approve와 confirm이 하나로 합쳐진 셈입니다.

"레퍼런스(reference) 있어요?"라고 하면 참고 사례나 선례를 묻는 것입니다. 영어에서도 비슷하게 쓰이지만, 한국에서는 거의 "벤치마크 대상" 수준으로 의미가 확장되었습니다. **"피드백(feedback)"**은 영어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한국에서는 "피드백 주세요"가 사실상 "검토 후 의견 주세요"와 "수정 요청"을 함께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칭찬이 섞인 피드백을 기대했다가 수정 사항 목록을 받는 일도 흔합니다.

아예 영어권에 존재하지 않는 표현들

"서비스 오픈했습니다"의 **"오픈(open)"**은 서비스를 출시(launch)했다는 뜻입니다. 영어에서 "We opened the service"라고 하면 어딘가의 문을 열었다는 느낌을 줍니다. 영어권에서는 launch, release, go live 등을 씁니다. 반대말로 쓰이는 "클로즈(close)"는 서비스 종료를 뜻하며, 영어에서는 shut down, sunset, deprecate 등이 자연스럽습니다.

"사인 부탁드립니다"의 **"사인(sign)"**은 결재 승인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sign-off에서 온 듯하지만, 한국에서는 그냥 "사인"으로 줄었습니다. "이 건 핸들링 잘 해주세요"라는 말도 자주 들립니다. 영어에서도 handle은 "처리하다"라는 뜻으로 쓰이지만, 한국의 "핸들링(handling)"에는 특히 민감한 상황을 조심스럽게 다룬다는 뉘앙스가 강하게 실립니다.

협업에서 튀어나오는 영어 동사형

회의나 협업 맥락에서는 또 다른 결의 콩글리시가 쏟아집니다. IT뿐 아니라 대기업 사무실 전반에서 공유되는 어휘라 "판교 사투리"라는 별명으로 유명하기도 합니다.

"이 건 팔로우업 부탁드려요"의 **"팔로우업(follow-up)하다"**는 끝까지 챙겨 경과를 확인해 달라는 뜻입니다. 영어에서 follow up은 동사구지만, 한국에서는 "팔로우업"이라는 명사형으로 굳은 뒤 "하다"가 붙었습니다.

"이 건에 디자인팀도 인볼브시켜주세요"라고 하면 참여/관여시키라는 의미입니다. 영어 involve는 주로 수동태인 "be involved in"처럼 쓰지만, 한국에서는 **"인볼브(involve)하다"**를 능동형으로 자연스럽게 씁니다. 발음이 살짝 꺾여 "인발브"로 들리는 경우도 흔합니다. **"어사인(assign)하다"**는 배정하다, 할당한다는 뜻이며 "이 티켓 저한테 어사인 해주세요"처럼 Jira 티켓을 배정하는 맥락에서 가장 자주 튀어나옵니다.

"팀 간 얼라인 좀 맞춰야 해요"라는 말은 방향이나 의견을 일치시키자는 뜻입니다. 영어 align 자체에 이미 "맞추다"라는 의미가 있지만, **"얼라인(align) 맞추다"**에는 한국어 "맞추다"가 한 번 더 붙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제가 드라이브 하겠습니다"의 **"드라이브(drive)하다"**에는 적극적으로 이끌고 가겠다는 선언이 담깁니다. 영어 drive에도 비슷한 의미가 있지만, 한국에서는 프로젝트 소유권을 가져가겠다는 뉘앙스가 강합니다.

"아삽(ASAP)" — as soon as possible을 한국어 발음으로 읽어 명사처럼 쓴 표현입니다. "이거 아삽으로 부탁드려요"처럼 말합니다. 영어권에서도 ASAP을 쓰지만, "으로"라는 조사가 붙는 방식은 한국식입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

몇 가지 이유가 겹쳐 있습니다.

첫째, IT 기술 자체가 영어권에서 왔기 때문에 원어를 그대로 가져오는 일이 자연스러웠습니다. 번역하면 오히려 어색하거나 의미가 달라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커밋"을 "확정"이라고 하면 git commit인지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둘째, 영어 원어를 가져오되 한국어 문법에 맞게 변형하는 과정에서 독자적인 표현이 만들어졌습니다. "머지 태우다"나 "배포 나가다"는 영어 명사를 한국어 구어 패턴에 녹인 결과입니다.

셋째, 빠른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한 환경에서 짧고 함축적인 표현이 살아남았습니다. "운영 환경"보다 "리얼"이 한 음절 더 짧고, "서비스 출시"보다 "오픈"이 빠릅니다.

문제라기보다는 특징

이런 콩글리시가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같은 맥락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효율적인 소통 수단입니다. 다만 두 가지 상황에서는 주의가 필요합니다.

영어권 동료나 파트너와 소통할 때 — "리얼 환경"을 "real environment"로 직역하면 의미가 전달되지 않습니다. 이때는 production이라고 바꿔 써야 합니다.

신입이나 비개발 직군과 소통할 때 — 이미 IT 콩글리시에 익숙한 사람끼리는 문제가 없지만,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리얼에 배포 나갔는데 터졌어요"는 암호에 가깝습니다.

결국 필요한 건 규칙보다 자각이에요. 제가 지금 콩글리시를 쓰고 있다는 걸 알고만 있으면, 영어권 동료 앞에서는 production으로, 처음 접하는 신입 앞에서는 풀어 쓴 한국어로 바꿀 여지가 생겨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