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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IT에서만 통하는 콩글리시 모음

한국에서 IT를 하다 보면 콩글리시를 많이 쓴다. 운영 환경을 “리얼 환경"이라고 하고, 서비스 출시를 “오픈"이라고 한다. 처음 들으면 어색한데, 몇 달 지나면 자연스럽게 입에 붙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게 영어권에서는 안 통한다는 사실을 잊게 된다.


환경 이름부터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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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real)” — 한국 IT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콩글리시 중 하나다. “리얼 환경에 반영했습니다”, “리얼 DB 접속 정보 주세요” 식으로 쓴다. 여기서 리얼은 운영(production) 환경을 뜻한다.

영어권에서는 production, 줄여서 prod라고 한다. “real"이라는 표현을 쓰면 “진짜?“라는 반응이 돌아올 수 있다. 의미는 통할 수 있겠지만, 업계 용어로는 쓰이지 않는다.

비슷한 맥락에서 스테이징(staging)은 그대로 쓰이고, 개발 환경은 데브(dev)라고 부른다. 그런데 유독 운영 환경만 “리얼"이 된 건 재미있는 현상이다.


동사로 쓰이는 영어 명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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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IT 현장에서는 영어 명사를 한국어 동사처럼 활용하는 패턴이 많다.

“커밋 때리다” — git commit을 하다. “때리다"라는 표현이 붙으면서 묘한 역동성이 생긴다.

“머지 태우다” — merge를 수행하다. “태우다"가 왜 붙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다들 자연스럽게 쓴다.

“빌드 돌리다” — 빌드를 실행하다. 이건 그나마 직관적이다.

“배포 나가다” — deploy하다. “이번 주말에 배포 나갑니다” 같은 식으로 쓴다. 배포가 어딘가로 출타하는 느낌이 있다.

이런 표현들은 영어 단어를 쓰고 있지만 영어권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I hit a commit"이라고 하면 상대방이 멈칫할 것이다.


의미가 미묘하게 비틀린 단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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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콩글리시는 영어 원어와 의미가 살짝 다르게 정착했다.

“스펙(spec)” — 영어에서 spec은 specification, 즉 기술 명세를 뜻한다. 한국 IT에서도 그 의미로 쓰이지만, 동시에 “이번 스펙 좀 큰데요?“처럼 작업 범위(scope)나 난이도를 가리키는 경우도 많다.

“컨펌(confirm)” — “컨펌 받았어요?“는 승인(approval)을 받았느냐는 뜻이다. 영어에서 confirm은 “확인하다"에 가깝고, 승인의 뉘앙스는 약하다. approve와 confirm이 하나로 합쳐진 셈이다.

“레퍼런스(reference)” — “레퍼런스 있어요?“라고 하면 참고 사례나 선례를 묻는 것이다. 영어에서도 비슷하게 쓰일 수 있지만, 한국에서는 거의 “벤치마크 대상” 수준의 의미로 확장되었다.

“피드백(feedback)” — 영어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한국에서는 “피드백 주세요"가 사실상 “검토 후 의견 주세요"와 “수정 요청"을 동시에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칭찬이 섞인 피드백을 기대했다가 수정 사항 목록을 받게 되는 건 흔한 일이다.


아예 영어권에 존재하지 않는 표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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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open)” — “서비스 오픈했습니다"는 서비스를 출시(launch)했다는 뜻이다. 영어에서 “We opened the service"라고 하면 어딘가의 문을 열었다는 느낌이다. 영어권에서는 launch, release, go live 등을 쓴다.

“클로즈(close)” — 오픈의 반대로, 서비스 종료를 뜻한다. 영어에서는 shut down, sunset, deprecate 등이 자연스럽다.

“사인(sign)” — “사인 부탁드립니다"가 결재 승인을 의미하는 경우가 있다. sign-off에서 온 것 같지만, 한국에서는 그냥 “사인"으로 줄어들었다.

“핸들링(handling)” — “이 건 핸들링 잘 해주세요"는 “잘 처리해 주세요"라는 뜻이다. 영어에서도 handle이 “처리하다"로 쓰이긴 하지만, 한국에서의 “핸들링"은 특히 민감한 상황을 조심스럽게 다룬다는 뉘앙스가 강하게 실려 있다.


협업에서 튀어나오는 영어 동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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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나 협업 맥락에서는 또 다른 결의 콩글리시가 쏟아진다. IT뿐 아니라 대기업 사무실 전반에서 공유되는 어휘라 “판교 사투리"라는 별명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팔로우업(follow-up)하다” — “이 건 팔로우업 부탁드려요.” 끝까지 챙겨 경과를 확인해 달라는 뜻. 영어에서 follow up은 동사구지만, 한국에서는 “팔로우업"이라는 명사형으로 굳은 뒤에 “하다"가 붙었다.

“인볼브(involve)하다” — “이 건에 디자인팀도 인볼브시켜주세요.” 참여·관여시킨다는 의미. 영어 involve는 주로 수동태로 “be involved in"처럼 쓰지만, 한국에서는 능동형으로 자연스럽게 쓴다. 발음이 살짝 꺾여서 “인발브"로 들리는 경우도 흔하다.

“어사인(assign)하다” — “이 티켓 저한테 어사인 해주세요.” 배정하다, 할당하다. Jira 티켓을 배정하는 맥락에서 가장 자주 튀어나온다.

“얼라인(align) 맞추다” — “팀 간 얼라인 좀 맞춰야 해요.” 방향이나 의견을 일치시키다. 영어 align 자체에 이미 “맞추다"라는 의미가 있는데, 한국어 “맞추다"를 한 번 더 붙이는 게 특징이다.

“드라이브(drive)하다” — “이 프로젝트는 제가 드라이브 하겠습니다.” 적극적으로 이끌고 가겠다는 선언. 영어 drive에도 비슷한 의미가 있지만, 한국에서는 프로젝트 소유권을 가져가겠다는 뉘앙스가 강하게 실린다.

“아삽(ASAP)” — as soon as possible. “이거 아삽으로 부탁드려요.” 영어 약어를 그대로 한국어 발음으로 읽어서 명사처럼 쓴다. 영어권에서도 ASAP을 쓰지만, “으로"라는 조사가 붙는 건 한국식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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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이유가 겹쳐 있다.

첫째, IT 기술 자체가 영어권에서 왔기 때문에 원어를 그대로 가져오는 게 자연스러웠다. 번역하면 오히려 어색하거나 의미가 달라지는 경우도 많다. “커밋"을 “확정"이라고 하면 git commit인지 알아보기 어렵다.

둘째, 영어 원어를 가져오되 한국어 문법에 맞게 변형하는 과정에서 독자적인 표현이 만들어졌다. “머지 태우다"나 “배포 나가다"는 영어 명사를 한국어 구어 패턴에 녹인 결과다.

셋째, 빠른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한 환경에서 짧고 함축적인 표현이 살아남았다. “운영 환경"보다 “리얼"이 한 음절 더 짧고, “서비스 출시"보다 “오픈"이 빠르다.


문제라기보다는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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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콩글리시가 나쁘다는 건 아니다. 같은 맥락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효율적인 소통 수단이다. 다만 두 가지 상황에서는 주의가 필요하다.

영어권 동료나 파트너와 소통할 때 — “리얼 환경"을 “real environment"로 직역하면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다. 이때는 production이라고 바꿔 써야 한다.

신입이나 비개발 직군과 소통할 때 — 이미 IT 콩글리시에 익숙한 사람끼리는 문제가 없지만,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리얼에 배포 나갔는데 터졌어요"는 암호에 가깝다.

결국 언어는 도구다. 상황에 맞는 도구를 꺼내 쓰면 된다. 다만 내가 쓰는 도구가 콩글리시라는 자각은 있는 게 좋다. 그래야 필요할 때 올바른 영어로, 혹은 명확한 한국어로 전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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