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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롭(Slop)'이라는 단어와 slop fallback

·5 분

요즘 SNS 피드를 내리다 보면 AI가 만든 게 분명한 어색한 이미지와 영상이 줄줄이 지나간다. 손가락이 여섯 개인 사진, 표정이 이상한 동물, 맥락 없이 감동만 강요하는 그림 같은 것들. 이걸 가리키는 단어가 따로 있다는 걸 최근에야 알았다. 슬롭(Slop) — 2025년 영국 이코노미스트, 미국 메리엄웹스터, 호주 매쿼리 사전이 모두 올해의 단어로 뽑은 신조어다.

세 군데가 같은 해에 같은 단어를 골랐다는 사실이 좀 무섭다. 단어 하나로 한 해를 요약해 버린 셈이니까.


원래 뜻은 음식물 찌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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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slop은 본래 음식물 쓰레기, 진창, 돼지에게 주는 먹이 찌꺼기를 가리킨다. 1700년대에는 무른 진흙을 부르는 말이었고, 1800년대에 들어 음식 찌꺼기, 그리고 “값싸고 가치 없는 것” 일반으로 의미가 번졌다.

말 그대로 흘려보내는 더러운 액체에 가까운 어감이다. 그 단어를 2025년 들어 AI 시대의 콘텐츠를 가리키는 비유로 다시 꺼내 든 것이다. 비유가 너무 적나라해서 한 번 들으면 잘 잊히지 않는다.


AI 슬롭이 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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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는 슬롭을 생성형 AI가 사용자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대량으로 찍어내는 저품질 콘텐츠 로 정리했다. 핵심은 세 가지다.

대량 생산 — 사람이 만들었다면 들어갔을 시간·노력 없이, 한 번에 수천 장이 쏟아진다.

저품질 — 손가락이 여섯 개거나, 사실관계가 틀렸거나, 맥락이 이상하다. 결정적으로 정성이 없다. 내 글도 정성이 없기는 마찬가지지만 난 적어도 글을 쓰고 한 번 읽어는본다.

원치 않는 노출 — 검색 결과 상단, SNS 피드, 자동 생성 기사 같은 곳에서 강제로 마주치게 된다.

세 조건이 다 맞아야 슬롭이다. AI로 만들었다고 다 슬롭은 아니다. 누가 의도를 가지고 편집한 결과물은 다른 이야기다.


스팸의 21세기 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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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롭은 자주 스팸과 비교된다. 둘 다 받는 사람 동의 없이 정보 채널을 점거한다는 점에서 닮았다.

다만 스팸은 무차별 광고였고, 슬롭은 콘텐츠 그 자체다. 더 교묘하다. 스팸은 광고라는 걸 숨기지 않지만, 슬롭은 정상 글·사진·영상인 척 피드에 섞여 든다. 영어권에서는 둘을 합쳐 슬롬(Slop + Spam) 이라는 파생어까지 만들어 쓴다.


왜 하필 2025년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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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메리엄웹스터, 매쿼리가 같은 해에 같은 단어를 골랐다. 평소엔 사전사마다 색깔이 다른데, 2025년만큼은 합의를 본 셈이다.

이코노미스트의 진단은 분명하다. AI 콘텐츠 생산자는 거의 비용 없이 찍어내지만, 이용자 쪽에는 진짜 정보를 가려내는 인지 비용 이 새로 붙는다. 검색 한 번에 진짜 후기와 AI가 짜깁기(짜집기는 잘못된 표현)한 가짜 후기를 가려야 하고, 친구가 공유한 사진이 실사인지 합성인지 의심해야 한다. 사회 전체로 보면 거대한 외부 비용이다.

흥미로운 건 그다음이다. 슬롭이 넘쳐날수록 신문·방송 같은 검증된 전통 매체에 대한 신뢰가 오히려 올라갈 수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그렇게 짚는다. AI 사진과 실제 작가 사진을 구분하는 어떤 실험에서 사람들은 신뢰할 만한 매체가 만든 콘텐츠라면 더 큰 비용을 낼 수 있다고 답했다고 한다. 정보가 넘칠수록 큐레이션 자체에 값이 매겨지는 구조다.

같은 해 옥스포드 사전 후보에는 vibe coding (AI에게 자연어로 시켜 코드 짜기), glazing (LLM이 사용자에게 과도하게 아부하는 현상 - 뭐 싫지만은 않다.), clanker (로봇·AI를 비하해 부르는 호칭) 같은 단어가 나란히 올랐다. 슬롭 하나만 도드라진 게 아니라 한 해 어휘 자체를 AI가 점령했던 셈이다.


슬롭 폴백 — 모르면 그럴듯하게 메우는 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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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지니어 입장에서 슬롭이 더 매서워지는 지점이 따로 있다. 슬롭 폴백(slop fallback) 이라는 표현이다. LLM이 잘 모르거나 답이 막혔을 때, “모르겠다"고 말하는 대신 그럴듯한 문장으로 빈칸을 채워 넘기는 동작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전 등재어는 아니고 영어권 엔지니어 사이에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굳어진 쓰임이다.

흔히 말하는 환각(hallucination)과는 결이 살짝 다르다. 환각이 “사실관계가 틀린 출력"이라는 결과론에 가깝다면, 슬롭 폴백은 “막히면 슬롭으로 떨어지는” 시스템 동작 패턴 자체를 짚는다. 모델이 모르겠다고 답하면 사용자 만족도가 떨어지니까, 학습·튜닝 과정에서 자신감 있는 헛소리 쪽으로 슬며시 기울게 된다는 진단이다. Antislop 같은 연구가 LLM 출력의 반복 패턴을 억제하려 하는 것도 결국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는 시도다.

문제는 이 폴백이 사람한테도 그대로 옮겨붙는다는 데 있다. AI 어시스턴트로 일하다 보면, 자료를 충분히 찾기 싫을 때 “AI한테 한 번 시켜보고 그럴듯한 게 나오면 그대로 가자"는 유혹이 생긴다. 본인이 직접 슬롭 폴백 회로의 한 부품이 되는 셈이다. 도구의 결함보다 이쪽이 더 신경 쓰인다.


도구를 쓰는 입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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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Claude Code로 문서 초안을 잡고, 이미지 도구를 쓰고, 검색 결과를 참고하는 사람으로서 이 단어는 가볍게 넘기기 어렵다. 내가 만들고 있는 게 슬롭이 아닌지 자꾸 자문하게 된다.

기준이 있다고 본다. AI를 써서 뽑은 결과물에 누가 읽을지, 어떤 가치를 줄지 한 번이라도 생각이 들어갔다면 슬롭이 아니다. 사람이 손을 댄 흔적, 의도와 편집이 묻은 흔적이 있으면 결 자체가 다르다. 반대로 광고 수익이나 SEO를 위해 양만 찍어내는 자동 생성물은 그대로 슬롭에 가깝다.

같은 도구를 써도 결과물의 격은 도구를 쥔 사람의 태도가 가른다. AI 시대 글쓰기에서 정작 비싼 자원은 모델도 GPU도 아니라 편집자의 자아 쪽일지도 모르겠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릴지 결정하는 그 감각.


단어가 생기면 비로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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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사전이 발표하는 올해의 단어는 그해의 정서를 한 단어로 압축해 놓은 결과다. 2024년이 brain rot이었다면, 2025년은 슬롭이다.

저질 콘텐츠 자체가 새로 생긴 현상은 아니다. 다만 AI가 그 생산 단가를 0에 수렴시켰다는 것, 그리고 그걸 부르는 이름이 생겼다는 게 2025년의 차이다. 이름이 붙으면 비로소 보이고, 보이면 거를 수 있다. 슬롭이라는 단어를 알게 된 것만으로 의외로 쓸 만한 정신 도구가 하나 늘었다.

피드를 내리다 멈칫하는 순간이 있다. 이게 슬롭인가. 그 멈칫이 한 번 생기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시간을 덜 빼앗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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